내가 나이 29에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고 낯선 병원에서 아이와 보내던 첫날 아침,,
시어머니는 자신의 점심 도시락 심부름을 시키고 가게 잔일 부려먹느라 남편을 정오때까지 잡고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고선 첫째 며느리도 몸조리를 시댁에서 했다하며 생색을 내서 시댁에서 몸풀때,
사실 며느리가 시댁에서 뭐가 얼마나 편할수 있을까..
몸풀라더니 눈치를 줘서 삼사일 후에는 설겆이와 청소등 집안일들은 스믈스믈 내차례가 되었고 허울좋게 자기들은 맘좋게 며느리 산후조리해준다며 동네방네 떠들더라.
처음 겪는 시댁살이는 이상하고 또 이상했다.
할머니는 전에 큰손주 윤정이도 자기가 직접 키웠다며 뺏어가듯이 데려가 버리고 나는 아이를 제대로 볼새도 없이하루종일 애를 집착하듯 빼앗아 가길래 나와 할머니 사이에는 남모를 신경전이 있었다.
특히 첨에 모유가 안나와서 우유를 먹이니 할머니의 애보기 정도가 심했었다. 하지만 아이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던 나를 여러모로 나무라기에 그렇게 뺏기고 맡길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태어난 간난아이를 갖고 노는 인형놀이에 심취해있었다.
내가 나중에 하루하루 자라나는 승아를 쪽쪽 빨며 이뻐할때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내가 나이먹어 낳은 딸이라서 애한테 집착한다며 트집잡고 나무라는데 어이가 없었다.
엄마가 간난아이를 예뻐하는걸 질투하고 나무랄 일인가 싶더라.
그렇게 이개월정도 됐을때 집에 모아두었던 돈을 도둑맞았다며 돈이 없어서 정한씨 학비며 생활비 못대주니까 내가 나가 벌어야한다더라.그런데 이상하게도 남편한테는 절대 한마디도 하지 말라하면서 애는 자기들이 봐줄테니 빨리나가서 일자리구해 일하라고 집에서 놀고먹지 마라 나를 불러다 호통을 쳐서 쫒기듯이 일자리를 구했다...
이상하게도 돈을 도둑맞았으나 범인을 잡으려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어머니 말인즉슨 돈이 없어졌을때 아버지가 혼자 집에 있었고 아무래도 아버지가 노름에 미쳤으니 훔쳤을것이라 신고할수 없다하더라.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나는 전에 일하던 레스토랑으로 돌아갔는데 가게사정상 문을 닫게 되어 다른 직장을 구해야 했다.
그때 내가 버는 생활비말고도 남편 비행기 공부에 따로 드는 비행기 실습비용200불때문에 하도 투덜대는게 듣기 싫어서 직장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때마침 야채가게를 십만불에 매매하고 그만둔 시부모에게 내가 발견한 카페자리를 추천하게 되었다. 조건이 너무 좋아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가게였기에 나도 일할테니 이 좋은 조건의 카페를 같이 하자고 했는데 시부모들도 같이 카페 보고 크고 좋다고 구만불에 흥정을 마치고선 선뜻 만불 디파짓을 걸더라. 그리고 그길로 집에와 그동안 일한몫으로 여행하며 쉬고 싶다며 형있는 미국과 한국으로 한달넘게 놀러갔다..
잔금도 안치루고 계약금만 걸어놓은 상태에서 우리는 그 계약금을 날릴까 걱정이되어 한달동안 그 가게에서 무보수로 일하며 일을 해야했고 시어머니는 3주가 넘어서 잔금을 주는대신 갑자기 은행융자를 알아보라며 위임장을 보내왔다.
나랑 남편이랑 그 디파짓 날릴까봐 애가 타서 어쩔수 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융자를 알아봐야 했다.
한달내내 한국이며 미국등등 해외돌아다니며 놀던 시어머니는 호주오기바로전날 한국에서 전화하더니 하는 소리가 자기들은 카페 하기싫은데 내가 부득부득 우겨서 하는것이라며 덤탱이를 씌웠다.
만약 일이 잘 안되어 틀어진다면 평생 내탓을 할것이 눈에 훤했고 그 의도가 보여서 뒤통수 맞은듯 괘씸했지만 한달이 지났기에 돈을 날릴수는 없는 노릇이라 남편에게 삼개월만 도와달라 도움을 청했고 말을 들은 남편도 어쩔수 없이 학업을 중단하고 같이 삼사개월을 일하기로 하며 동참하게 되었다.
그게 그 악몽의 시작이었다.
시어머니는 삼사개월동안 우리들에게 주급은 커녕 카페사는데 돈을 빚졌다며 돈을 안주려고 별짓을 다했다. 원래는 야채가게 판돈 십만불을 카페 사는돈 구만불에 넣었어야 했는데 디파짓이후에 남은 8만불을 다 융자를 얻었고 주방 고친다며 사만불을 더 빌렸으나 그 돈들은 난 구경도 못했다. 전부 그대로 어머니가 챙겼다. 심지어 주방 고칠돈이라고더 빌렸던 사만불을 챙겨간 어머니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돈문제 뿐만이 아니라, 사개월동안 가게에서 진짜 별별 진상짓을 벌이는 어머니에게 난 질리고 또 질려버렸다. 공과 사는 구분하자며 앉지도 못하게 닥달하고 신혼인 우리가 서로 자리 양보하며 애정표현이라도 하면 질투나서 짜증난다고 하지마라 지럴댔다. 바쁘게 커피만드는 내가 혹여 중간에 푼돈들을 가로챘을까봐 음식을 세며 매상을 체크하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카페 광고를 홍대미대 출신 친구의 도움으로 예쁘게 하려하니 자기 뜻대로 안했다고 지럴지럴…같이 도와 일을 하던 터키사람인 카페 전주인이 보다못한 어머니의 억지에 젊은사람 말들으라며 말릴 정도였다. 그러다가 사개월정도되서는 주방에서 일하며 연기가 자기 건강에 안좋다며 일못하겠다고 지랄지랄…
그럼 당연히 빌린돈으로 카페를 고치는게 답인데 갑자기 아버지가 노름해서 돈이 없다며
표정하나 안바꾸면서 잡아떼는데 그동안 돈없다며 주급은 커녕 쉐어비 낼돈 백불받으며 고생하는 우리에게 자기 입으로 일년뒤 약속한 아파트계약도 물건너갔다며 그리 알아라 하는데.. 미안하다라는 말도 없이 주급도 제대로 못받고 일했는데 약속한 집도 못해주겠다니 어느누가 가만히 있겠냐..
딱 보아하니 첨에 인수하고 장사가 맘처럼 안되서 자기들이 뭐라 할만한 돈이 안되니까 어머니가 어떻게 해서든 내 핑계 대고 발을 빼려 잔머리를 굴린 것 같았다.
그리고 사사건건 시비걸며 도통 일에 전념할수도 없게 만드는 그 지럴맞은 성격에 나도 폭발했다. 나가서 일단 집에 계시라고 내가 전담으로 일하겠다고..
그랬더니 얼씨구나하며 자신들이 가진 은행융자빚을 나에게 떠넘겼다.
달링하버때 형 결혼시킨다고 빌린 십여만불과 야채가게 인수할때 들었던 십여만불..
도합 삼십만불이었고 거기에 가게 산돈과 고칠돈까지 포함한 12만불까지...
천문학적 빚을 난 써보지도 못하고 다 갚아 나가야 했었다.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게를 그만둘 상황이 아니어서 다 덤탱이를 쓰게 되었다.
그만 두었다면 뭐라 했을지 뻔했기에 질수 없었다.
그렇게 코낀 채 학업을 중단한 남편과 온 힘을 쏟아서 카페를 하다보니 돈은 안되고 고생은 이루 말할수 없는데 애도 못보고 하루하루가 희망이 없었다.
한달두달 일년이란 시간은 흘러가는데 아이랑 살집정도 마련하자니 앞이 안보이고 그랬다.
그래서 시댁에다 내가 좀 우겨서 가게 근처 아파트를 사게 되었다. 아니면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집사주기 싫어 별별 핑계를 다대는 시어머니를 보면서도 그래도 난 포기안하고 아파트를 구하게 되었는데..
아파트살때 계약금조차도 은행융자빚을 져 우리에게 떠 넘기면서도 어머니가 나타나지도 않아 빵구낸 인스펙션이 한둘이 아니었다.
결국은 돈한분 안주고 남은 아파트융자금까지 그 어마어마한 빚모두를 우리몫으로 넘겼고
다행히 점점 바빠지는 카페에서 나오는 돈으로 매달 만오철불이 넘는 융자금을 충당하며 죽자사자 일에 몰두했다. 그렇게 일하는데 그래도 다행히 카페가 잘되어서 빚은 어느정도 갚아 나아갈수 있었다.
하지만 다 은행에 나가는 돈에 인건비와 카페유지비가 많이 들어서 정작 수중에 쓸돈이 너무 없었다.
우리 이름으로 빌린 나머지 삼십만불 융자금 낼돈도 빠듯했다.
그래서 주중에 번돈은 빚갚아야되니 돌려드리고 토요일날 카페 문열고 번돈은 내가 가져가겠다 아니면 일못하겠다했더니 어머니는 마지못해 승낙.. 하지만 그것도 못보고 나중에 그 돈 못 뺏어먹어 안달내는걸 몇번이나 지켜냈다. 내가 가게돈 빼먹고 안준다고 의심해서 정한씨 시켜서 회계 뺏어갔던적도 있었다.
나중에 정한씨가 돈없어서 못하겠다 손들고 다시 돌려주었지만..
그리고서도 뒤로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집해주고 가게해줘서 먹게 살게 해줬다며 자랑질을 하고 다녔다 그말을 뒤로 딴사람들한테 들었을때 정말 기가 막히더라.. 듣고도 믿기 힘들어 여러번 반문을 했을 정도였다. 더 황당한것은 사람들이 우리 덕분에 집에서 노는 시부모를 부러워하자 그 꼴도 듣기 싫어하며 내가 빚을 많이 지고 가세를 기울게 한다며 매번 나한테 트집을 잡았다.
그러다가 그 와중에 한국에 있는 여동생이 호주 오고 싶다고 해서 옷가게를 같이 하자해 이만불에 작은 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다. 우여곡절끝에 옆집 은행장의 배려로 개인 론 삼만불을 얻어 옷가게를 열었지만 온다던 동생은 오네안오네 하고 있어서 커피숍과 옷가게를 오가며 진짜 미친듯이 아침 6시부터 카페와 번갈아가며 하루14시간씩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옷가게에 대해 내가 카페 돈을 뒤로 빼먹었다며 온갖 모함과 험담을 하는데.. 가뜩이나 장사땜에 머리 터질것 같은 나한테 아주 눈물나게 고마운 시댁이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토요일날 가져가는 돈을 다시 뻇고 싶어서 그러는것이었는데 그래봤자 그날 하루매상 5백~천백불로 우리 둘 주급챙기는걸 못보고 안달을 내더라. 둘이 주 60시간 넘게 일해주고도 나혼자 벌때보다 못한 처우였는데 양심없는 아주 못된 사람이었다.
중간에 한국엄마가 보고 싶다고 비행기표를 보내왔다. 오년 넘게 못보니 엄마도 많이 보고 싶었는지 돈줄테니 와라 했는데 그래도 첫번째 친정나들이를 엄마돈으로 가는건 속상해서 비행기표는 아이걸로 대신했고 내것은 우리가 한푼두푼 모아두었던 돈으로 사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 시댁에서 할머니가 집에 들렀는데 한국 갖다 주라며 일제 참기름 1리터 한통을 가져다 놓았다. 난 그게 첫친정나들이 선물이라는건 생각지도 못했다.가게 쓰라는것인줄 알고 가져가지 않았는데 나중에 뭐라뭐라하더라.. 세상에… 첫 친정나들이에 돈 한푼안준 시댁의 선물이 참기름통이라는게 어이없었다.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어른 셋이서 놀러다니며 승아한명 보는데 생색은 어찌나 내는지.. 애핑계대며 가게돈 빼먹으는 짓거리를 하는걸 몇번 눈감아 준적도 있었다.. 그런식으로 자기들은 놀며 우리 내외는 삼년을 죽자사자 일했는데..
그렇게 둘이 미친듯이 일하면서 정신없이 빚갚는 상황에 8만불짜리 차를 사서 나한테 오히려 왜 차 안사주냐며 따지더라..
그런식으로 하면 나가는 돈이 너무 많다고 그럴려면 대신 집 팔아서 작은 집으로 이사가고 남은 돈으로 가게 빚 갚아주면 은행에 이자로 줄돈대신 주에 천불씩 캐쉬로 주겠다했다.
아량넓은 제안이었는데 속좁은 어머니는 말도 안된다며 거절했다.
뭐 거의 집 잡아먹는 나쁜년 취급을 하더라..
참다 못한 나도 기가 막혀서 이제 가게 팔겠다하니.. 팔아봐라 하며 비웃던 어머니..
그리고 그렇게 내가 성심으로 키운 아까운 가게를 팔아야 했다.
그사이 아버지가 차핑계로 우리 부부에게 트집잡고 윽박을 질러 속상한 내가 받아버릴려고 했는데 어머니랑 할머니가 오히려 말못하게 윽박지르며 말리더라. 그런식으로 두여자는 남편하고 나한테 늘쌍 입다물라며 아무말도 못하게 했다. 남편은 화를 내며 자리를 피해버리고 그때 더이상 참을수 없어 이혼을 결심하며 가방을 쌌다가 우는남편과 죄없는 아이때문에 맘을 고쳐 먹었다.
잘나가던 가게라 여기저기 사고 싶다는 사람이 좀 있었다. 그러다가 진짜로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 30만불에 팔게 되었다.
긴가민가 하던 시어머니가 깜짝 놀라더라.. 정말 내가 그렇게 팔줄은 몰랐으니까..
고맙다는 말한마디없이 돈에 환장하며 좋아하던 그이들은 우리에게 용돈은 커녕 한푼도 남김없이 다 털어갔다.. 난 치가 떨렸지만 순순히 다 털어주었다.
그때 내가 군소리 없이 삼십만불 전부를 주었던 이유는 가게가 시부모꺼라서?? 천만에..
내가 발견하고 내가 키우고 내가 팔았는데 왜 자기들이 생색인데??
자기는 싫지만 나때문에 가게 한다며 나에게 다 덮어씌우려던 시어머니는
가게가 잘되니 나에게 대놓고 자기가 시내에 가게낸건 잘한거라고 자화자찬을 하더라…
가게 산 돈 융자금도 내가 다 내고 있었는데 왜 그게 시부모가게일까??
그래도 암말않고 돈 준 이유는 그 돈 먹고 이제 우리 인생에서 떨어지라고…
다시는 볼일 엮일 일 없을테니까 그돈으로 마무리 한것이었다.
판돈 삼십만불을 넘겨주는 과정에 가게에서 모은돈과 잔금을 합쳐 남은 시댁에서 우리 이름으로 빌린돈 십오만불을 마저 갚고나서 가게 구좌에 혹시라도 모를 세금문제를 해결하고자 가게 빚갚고 모은 돈 현찰 삼만불을 구좌에 남겨놓았는데 그 구좌는 남편에게 일임하며 난 옷가게에 몰입했다.
시댁쪽으로는 얼굴도 마주하기 싫었으니까.
내가 카페 접고 옷가게에 집중하니까 그전까지 마이너스로 겨우겨우 세만 내던 옷장사가 진짜 엄청난 흑자로 돌아섰다.
주에 천불이 나올까 말까하던 가게가 주에 오천불 칠천불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반이상이 우리몫이었다.
직장잡은 남편도 너무 놀라 좋아했고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챙기며 남은 삼십만불 융자금을 문제없이 갚아가며 오순도순 잘먹고 잘살아가게 되었다.
카페팔고 일년정도 지났을까..
평소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던 어머니가 갑자기 옷가게를 찾아와 미소띈 얼굴로 친한척을 하며 함께 음식장사를 하자더라. 전에 내가 하고 싶어하던 한식 음식점을 할 생각이 있다며 같이 가족이 힘모아 가게 내자며…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한테 뒤로 한달에 삼천불씩 일년을 받아먹고 있다가 세금으로 남겨둔 돈이 다 떨어져 없으니 이제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사악한 시어머니는 아무것도 몰랐던 나를 찾아와 친한척을 하며 돈댈테니 같이 가게하자 애원한것이었다.
물론 나는 이제 다시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으니 아는척 하지 말아 달라며 거절했다. 그날 집에 와서 그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그제서야 남편이 구좌에 남은 현금 삼만불을 어머니가 가져다 다 썼다 털어놓더라.. 어쩐지 카페 그만두고 시부모가 이상하게 조용하다 생각 했었다..
카페 넘기고 생활비할 돈없다고 징징거려 매달 구좌에서 삼천불씩 빼주었다던데 이제 남은돈 없다고 하니 날 찾아와 모르는척 그 짓거리를 한것이었다. 진짜 얼굴 두껍고 성격 이상한 여자였다.
막상 돈이 끊기니 자기가 직접 돈을 벌기는 싫고 가게 차려주겠다는 감언이설로 날 꼬실려고 수를 쓴듯.
미치지 않고서야 그 지옥에 다시 들어갈 사람이 어디있냐..
게다가 그동안에도 아버지의 노름은 계속되었다며 돈 갚아달라 한번 찾아왔길래..
그럴거면 이혼하라 했다.. 이혼하면 할머니랑 어머니는 같이 살 의향이 있다고…
뭐.. 진심으로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정한씨 생각해 한번 해본 말이었다.
그말듣고 남편이 내손잡고 평생 소원이었다고 고맙다고 울더라..
그랬는데 역시나 이혼 못했다.. 재산의 반을 남편 줘야 하는데 그게 싫었던 거다..
그러다 나중에 이래저래 집을 팔고 아버지와 타스마니아로 이사 가겠다 하더라.
가지 않는게 좋지않나 했는데 막무가내로 그렇게 타스마니아 이사갔다.
그때 어머니도 아버지와 쿵짝이 맞아서 누구 말도 듣지않으며 신나게 넘어가서 집판돈 쪼깨 타스마니아에서 집몇채사고 부자행새하며있더니 타스마니아 시내 좋은집 놔두고 깡시골로 들어가 관광수입에 의존하며 살더라..
역시나 그 와중에도 아버지의 노름은 계속되었다.
원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는 투덜대며 살다가 외로워서 못살겠다 시드니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난리였다.
그러던 어느날 시어머니가 병에 걸려 시드니로 오는 일이 생겼다.
솔직히 꼴도 보기 싫을정도로 치가 떨리며 싫었던 시댁이었지만 암에 걸렸다는데 내치기 뭐해서 안방을 내주었다. 그렇게 내집에 5개월정도 얹혀살면서 창고방에 우리가 있었고 안방을 자기들이 썼는데 주에 사백불씩 꼬박 꼬박 생활비를 주었더니 할머니가 모두 먹이는데 사백불이 모자라다며 더 달라하는데 어이없었다.
오분거리에 있는 집과 가게 사이에서 점심때 먹으라고 준건 밥도 아닌 삶은 고구마 두개가 다였다. 내가 살쪘다며 쌀빼야하니 고구마두개만 먹으라는데..
아침에 나가서 저녁 8시 퇴근하면서 장사에 바빴던 나를 보며 두여자는 트집 잡으려 혈안이었다. 에어프랑스에 다니던 남편이 적성에 안맞아 일못하겠다 그만두고 하루종일 집에 있었는데 일하는 나보고 아이에 대한 애정이 없이 애를 제대로 안본다고 트집잡고 지럴지럴…
무직인 남편에게 놀지 말고 그냥 같이 장사하자 했더니 내앞에서는 남편이 장사해야 하는데 하며 편들고선 나 없을때엔 남편보고 장사말고 회사다니라고 내눈치 보지 말라 부추기는 꼴이 마치 우리가 싸우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가게일 때문에 물건하러 한국가는것도 못마땅해하며 내가 놀러가는줄 여기며 트집이었다.
정말 꼴도 보기 싫은 골치덩어리들이었다.
그렇게 있다가 가게가 생각보다 잘 돌아가니까 내가 아무래도 좁은 아파트보다는 좀더 큰 하우스로 옮기는게 나을듯 집을 알아보게 되었다. 어차피 어머니의 암치료는 장기전이라 시드니의 우리집에 있을 확률도 높았고 아파트는 모두가 같이 살기에 매우 좁았다.
그랬더니 집사는데 돈 달라까봐서 얼른 아파트를 얻어 나가더라… 가던가 말던가.. 난 상관없었다.
사실 우리끼리 아파트 사는건 아무 문제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울티모 집을 얻게 되었는데 디파짓 오만불만 잠시 빌려달라는것을 이런저런 핑계로 피하는걸 보며 재수없었다.
오히려 나보고 왜 집을 두채나 사냐며 욕심이 많다고 투덜대며 손가락질을 하더라.
그러다 할머니가 시드니에서 정부집얻어 살았는데 간간히 들여다보는것도 우리몫이었다.
사실 첨에는 정신세계가 이상한 시어머니보다는 그나마 어린시절 아이를 애정갖고 키워준 할머니에게 고마워서 잘하고자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가게일로 한국 갔다 올때마다 할머니 옷과 화장품을 바리바리 사다 날랐고
아버지가 구박하느라 할머니에게 큰소리 지르면 앞에서 그러지 말라고 나선것도 몇번이었다.
하지만 가게 끝내고 몇년을 가까이 지내보니..
할머니의 정신세계도 어머니 만큼 이상하다는걸 알게 되었다.
결혼하고 들었던 할머니의 얘기들을 종합해 볼때
젊어서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인 남편과 안맞아서 괴로움에 이혼하겠다는 딸을 막고선
있는 돈 털어주며 둘이 힘모아 장사하면 두 손주 봐주겠다는 말로 옆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뭐 그때는 이혼이 쉬운일도 아니어서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돈은 벌지만 일정한 금액이 아니었던 사위를 제끼고 자신이 차린 가게로 일정금액 돈을 버는 딸옆에서 도와주는 모습으로 딸에게 할머니는 그렇게 딸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옆에서 딸의 고민과 힘든 육체노동을 돕는듯 하였으나 안하무인이자 무직자인 사위 흉을 보며 둘사이를 이간질해서 마음이 서로 더욱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런 할머니때문에 딸에게 사위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인듯해졌다.
정말 사랑하고 애지중지하는 딸과 아이들이
번번히 노름으로 딸이 번 돈 탕진하는 못되고 폭력적인 무직자인 사위와 그런 환경에서 산다면
사실 서슬 퍼런 엄마의 입장에서 그걸 두고 보며 그 오랜시간을 같이 산다는게 이상하지 않은가.
옆에 같이 붙어 살기위해서 딸과 아이들을 아버지에게 말한마디 제대로된 대꾸도 못하게 억압하며 키운것도 그렇고 내가 시집와서 보았던 맛없다고 밥상을 엎는 정상적이지 못한 사위에게 암말 못하고 살아온 할머니가
좀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이 들었고 노인네이기에 그냥 그러고 사는게 익숙한가보다 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이 집에 같이 살기위해 또아리 틀고 주저앉아 암말 못하고 눈치나보는 연약한 여자 코스프레를 하며 딸과 두 손주들에게 모든건 막무가내 아버지가 원흉이라며 모든것을 아버지탓으로 흉보는것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며 수십년을 같이 살았다.
할머니는 영어 한마디 배울생각도 없이 아이들에게만 매달려 수십년동안 사위인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아버지의 폭력성과 안하무인을 강조하며
할머니인 자신과 엄마가 아무런 죄없이 그런 아버지에게 희생 당하고 사는 모습을 번번히 노출시킴으로서 심지어 청소년시절 남편의 소원이자 꿈이 싫어하는 아버지와 엄마가 이혼하는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노름과 횡포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 쓰러져 병원신세를 진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며 아버지를 세상 나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아이들에게 얘기하면서 밖으로는 집안에 대해 소문이라도 나갈까봐 쉬쉬하며 자기들끼리 묻으며 아이들과 가까운이들에게는 무조건 입다물게 하고선 착하고 죄없는 자기들이 폭력에 희생당하는척을 했다.
하지만 얼마전에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니의 정신상태가 이상한게 아니라
어머니가 원래 어릴때부터 따로 정신병적 발작증세가 있었다는걸 친척들을 통해 나중에 알게 되었다.
같은 이유로 나중에 아이가 갑자기 어머니와 비슷한 증세로 병원에 가게되는 일이 생겼는데
할머니가 다짜고짜 앞뒤정황도 묻지 않고 놀라서 정신 없는 나한테 애한테 대체 무슨짓을 한거냐며 소리치기에 그때 지나간 모든 상황을 깨닫게 되었다.
할머니가 그동안 모든 일을 병적으로 쉬쉬하는 이유가
아픈 딸에 대한 비밀이 세상에 새어나갈것에 대한 조바심과
같이 붙어 살고자 하는 자신의 욕심때문이었던것을 다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유복자로 낳아 애지중지하며키운 어머니의 정신상태는 원래 온전치 않았다는것을 숨기기위해 자신의 사랑이란 이름으로 옆에 붙어 살며
할머니는 모든것을 아버지탓을 하며 살아왔다는것을…
이제는 그탓을 나에게 돌리며 모른척을 한다는것을...
몸과 마음이 정상이 아닌 딸은 정신적 지주였던 엄마의 반대로 인해 그런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아무말도 못하며 그저 답답한 마음에 이혼을 꿈이자 희망으로 생각하며 살아온듯했다…
생전에도 이혼은 여러번 시도는 했으나 할머니가 극구 반대를 했고 그 적극적 만류로 주저하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어린 두 아이도 폭력적인 아버지의 성격을 참으며 자라나야 했다.
딸이 죽어 장례식 치루던 날도 문상온 사람들에게 정력제를 팔아대며 막무가내로 구는 사위의 태도에도 오히려 아무소리 못하고 딸잃은 에미의 불쌍하고 가여운모습으로 온갖 동정 다 받고 있더니 사위의 잘잘못을 따지려는 나에게 오히려 집안 분란일으키려 한다며 윽박지르는 이상한 사람..
이것은 정상적인 집안이라면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식하고 못배운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다고 하기에는 앞뒤가 안맞는 일이 너무 많았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난후 집구석에 있는 어머니 돈 다들고 사라진 아버지 가 소식 끊겼다가 두달만에 할머니집에 찾아왔는데 조신하게 조식과 저녁 밥상 잘차려 먹이며 수발드는게 기가 막혔다.
그러다가 며칠후 우연히 카메라에 담긴 그동안의 사위의 행적을 우리가 알게 되었는데..
사라진 두달동안 내나이 또래의 젋은 여자랑 베트남으로 여행을 다녀왔더라. 그리고 그 카메라에는 그 여자와의 호텔에서의 변태같은 애정 행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자기 딸이 죽은지 두달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놀다와서는 장모가 차려준 밥상머리에서 죽은 와이프 생각하며 그동안 병간호로 쌓인 복잡한 머리 식히며 쉬다왔다는데 할머니는 화도 한번 내지 않고 모르는척하며 넘기더라
병간호는 무슨…
타스마니아 정원일이 바쁘다며 한달에 한번 시드니에 얼굴도 내밀지 않았던 사위..
두어달만에 시드니에 와서도 캠시의 자기친구(창녀집 가는듯)만난다고 놀러나가서 병원도 안데려갔는데 낮에 회사에서 일하던 남편에게 전화하며 징징거리던 두 여자들..
정말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 치료차 타스마니아에서 시드니로 와있을때 남아있던 사위한테 동네 여자가 붙었다며 의심하더니 그 의심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잡기위해 혼자 타스마니아에 불쑥 찾아가서 흔적을 찾으려 혈안이었던적이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심증만 있었고 확증은 못잡았다.
그랬던 사위가 딸이 죽자마자 보란듯이 돌아다니며 여자 만나는데 그런 지경에 왜 저렇게 뻔뻔하게 할머니가 차린 밥상 찾아먹는 사위에게 아무소리를못하는것일까싶었는데..
할머니가 직접 화를 내는 사건이 생겼다
그건 바로 그 사위가 할머니 아랫층에 사는 어머니 또래 여자랑 바람이 났었는데.. 자신의 집에 찾아온 사위 흔적을 따라 그 아래층까지 쫓아갔다가 파자마차림의 아버지가 문을 열자 화를 내며 돌아왔다는것이다.
그때 씩씩대며 화를 내며 하소연하던 할머니가 내눈에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실 파자마차림보다 호텔사진이 더 기가 막혔었는데 그에 대해선 보고서도 아무말도 안하더니 아래층에서 보인 아버지의 파자마차림에 마치 증거잡은 조강지처처럼 화를 냈다는게 이상하지 않은가.
막상 그 모습을 직접보니 화가 난것일까?
그 여자가 찾아와 어머니로 모신다니까 성질내더라
그래도 사위한테는 제대로 한마디도 못했고.. 정말 이상했다.
더 큰 일은 이후에 사위가 돈때문에 찾아와 목을 조르며 협박을 한 일이 있었다. 그 사실도 우리에게는 비밀이었다가 아래층 사는 친한 아줌마가 말해줘서 알았다. 그 아줌마가 직접그 광경을 보고 뜯어 말렸다고 ..
기가 막힌건 그때 그런 막되먹은 사위가 와서 김치 먹고 싶다고 했다고 아줌마한테 사위에게 김치 못챙겨줘서 마음에 걸린다 했다더라..
헐.... 그게 착한 심성이라고 말해야 하나?? ... 아니... 그 마음과 상황이 이상한거지...
내생일은 나이먹어 잊어버렸다며 알면서도 생깐게 십년이 될 정도로 못되어먹은 심성이 있는 사람이고 나한테는 말도 안되게 시골 시어머니가 민며느리한테 하듯이 못된짓하며 괴롭히는 그런 짓거리들을 반복하더니.
예로 자기 주방은 손도 못대게 하면서 내가 설겆이를 하면 다시하고
내음식이 맛있으면 싫어하며 질투를 하더라.
그래놓고선 난 제대로 아무것도 안한다며 눈치를 준다.
한번은 옆집 러시아 할머니와 집앞에 놓인 알로에로 실강이를 벌일때도 그랬다.
그 러시아 할머니가 자기 통행에 방해 된다고 알로에 치워달라 몇번을 말했는데 몇달동안 고집을 부리며 모르는척을 하다가 참다못한 러시아 할머니가 알로에 집어던지며 싸우다가 화분으로 얻어맞는 육탄전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육탄전에 대해 사무실에 항의해도 통행로에 알로에 놓은 할머니가 잘못이니 치우라했는데 그걸 열받아 못참고 다음날 또 그 똑같은 자리에 알로에를 내놓을정도로 고집이 장난 아닌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인성 못된 사위에게는 그리 애달픈 이유가 뭘까 싶었는데 그런 할머니가 나에게 주제넘게 시어머니 노릇을 하기 시작하면서 의심이 커졌다.
애지중지 키운 딸을 죽어서도 막대하는 사위에게 왜 그렇게 말한마디 제대로 못하는것일까?
그동안 살면서 사위를 남자로 봐서 그런건가? 좋아하고 애정하는 마음이 커서 그런건 아닐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혹시나 둘이??? 어머니 몰래 선을 넘었던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8살 연하의 사위를 남자로 여기며 딸옆에 붙어 살아온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불행한 삶을 사는 딸이 이혼하겠다는데도 극구 못하게 막았던 이유와.
세상 어느 며느리가 시부모 이혼을 시키려하냐며 오히려 내엄마에게 따지던 할머니의 이유가 여기 있는듯 싶다…
유달리 정력이 넘치는 시아버지는 평상시 내가 대하기에도 좀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던게 사실이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잠시 우리집에 머물때는 발코니에 서서 창문으로 우리방을 기웃거리다가 옷갈아입던 나와 눈이 마주친 그런 시아버지였고…
어머니가 병들어 아플 때에도 자신의 정력을 주체못하고 캠시를 며칠동안 드나들며 정력에 좋은 약이라면 탈탈 털어서 모두 자신의 입에 쳐넣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나이 팔십이 넘어서 이여자 저여자 만나고 집적대고 돌아다니며 남은 가산 다 탕진하고 있다.
지금 상황...
사람 참 안바뀐다라는 말이 맞다
시외할머니가 구십넘게 살면서 정신 말짱하게 할줄 아는건 여전히 이간질과 가스라이팅 뿐이다
전에 자기딸인 시어머니가 암에 걸려 시드니에서 병치레를 했을때도
회사 눈치보며 일하는 남편한테 허구헌날 전화해서불러내며
xx아xx아 어떻하니 xx아 하며 징징징..
병원에 쇼핑에 매일매일 7일내내 이 삼년동안을
낮이고 밤이고 불러다가 심부름 시키고 일시켜서
회사가 알아채고 거의 잘릴뻔 했었는데도
엄마가 아프고 힘없는 할머니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애써 자기가 다하며 참아내던 남편..
아버지는 이기주의자에 무용지물이라 옆에 있지도 않았는데
어머니나 할머니나 이상하게 아버지한테는 아무말도 못하며
그저 착한 내남편만 닥달하고 징징 짜며 도와달라하는데
그 스트레스를 수년간 꾹꾹 눌러 다 참았던 남편이었다
막판 돌아가시기 저 이년동안의 그 맘고생은 정말 말할수가 없었다
나중에 당뇨에 걸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빠를 일찍 잃은 나도 옆에서 보며
그 속이 어떨지 짐작이돼 맘이 아팠고
엄마가 가망없는데 뭐라할수 없어서 그저 돌아가시기전
맘에 후회 남지 않게 기운내라 응원하며 승아랑 우리는 알아서 할테니 신경쓰지 말라는것뿐
그의 힘든 마음을 그렇게 다독일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뜬금없이 미국 사는 형이 아버지를 존경하며 평소에 잘하라며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를 받은 남편은 기막혀하며 서러워 울기까지 했다
지금 보니 그때 그 두 여자는 대체 무슨 말로 이간질을 한걸까?
장례식 끝나고도 형은 우리에게 수고했고 그동안 고맙다란 말을 하지도 않더라.
남편 불러대는것도 모자라 나조차 일주일에 세네번을 가게 끝나고 들여다 보았는데
볼때마다 늘 불만 섞인 표정으로 투덜투덜.. 남편만큼 안한다고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돌아가시기 바로전날 밤에는
옆에서 병실 지키며 있는 우릴보며 난데없이 자기는 나에대해 나쁜 얘기 한번 한적 없다며 하더니만
그건 모든일에 찔리니까 그런 모양이었나보다
그런적 진짜 없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오늘내일 하는 사람한테 말해봤자 소용없어서 그냥 입다물었다.
그리고 다음날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
우리한테 미국형이 뭘했냐며 여태 너네가 마니 고생했다던 아버지는
장례식장에서 오는 사람들한테 정력제를 팔아댔고 장례 끝나는 날,
일반비용치루고 남아있는 장례비용 싸들고 나가려해 기막혀 따지려는 나한테
할머니는 오히려 입다물라 호통이었으며 미국에서 온 형네만 챙기느라 우리는 본채만채 하고 있어서
그당시 난 그저 어이없고 진짜 이해도 안되고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헛웃음만 나오더라.
그래도 그렇게 혼자 남은 할머니는 오롯이 우리 몫이 되었는데
자기 딸 제사도 둘째인 우리보고 지내달라 해서 그 오년을 남편 생각해서 군소리없이 모셨었다
그러다가 제작년2019년에는 할머니가 유방암에 걸려 수술로 병원신세 질때도
밤세며 병간호 한것도 나였고 이후에 병원 갈때도 늘 내가 같이 갔는데
그런 나한테 내생일 알면서도 나이들어 잊어버렸다며 생까기 시작하면서 사단이 나기 시작했다.
첨에는 나도 그런줄 믿었고 몇년을 속았다
중간에 내생일 이틀뒤인 자기 생일은 우리가 잊고 넘길까봐 달력에 표시해두며 챙긴걸 뽀록나기전까지는…
그리고선 얼굴 두껍게도 내가 사다준 케익을 먹다 남겨 나한테 던져주며 여기다 초꼿고 니 생일 해라 하는데 한두번도 아니고 매번을..양심도 없이 내가 병원에 있을때도 내 엄마 앞에서 그짓을 하더라.
내가 사십 넘기자마자 우울증이 와서 고생할때였다,
외롭고 힘든 타지 생활에 정붙일려고 노력하는데도 받아주지 않는 시댁때문에 맘이 많이 상했었다.
좋은 대접은 바라지 않더라도 가까운 내생일조차 몇년은 모르고 넘기는 나이먹은 할머니가 기억력이 안좋아 그러려니 속으로 섭섭해도 참으며 그만저만 넘겼다.
그래도 할머니 생일에는 호텔부페로 모셔가 챙겨 먹이면서 내년에는 조금 달라지기를 바랬지만 매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자기가 늙어서 잊어버렸다 하더라..
그러던 어느날 우리가 자기 생일 잊고 넘겼다며 신경질내며 화를 내길래 할머니가 잘못세서 그런것이라 정정해 주는 일이 생겼고 또 그 다음주 내생일을 보란듯이 잊어버렸다며 넘기는게 뭔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난 할머니가 그 수년동안 일부러 내생일을 쌩깠다는걸 알게되었다.
자기 딸 제사지내는 내생일을 그런식으로 생까는데.. 그렇게 매번 어느새 십년이란 세월이 되었다.
약을 올리는것도 아니고 이건 정말 기가막힌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미친것도 아니고 할머니한테 잘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나.
그렇게 못된 심성으로 십년동안을 내 생일을 그런식으로 무시하더니
이제는 나한테 사사건건 어줍잖은 시어머니 노릇을 하기 시작하는데..
앞에서는 위하는척 아무것도 하지마라 해놓고선 뒤에선 못마땅해하며 욕하는게 그 할머니 스타일..
사실 생전 시어머니도 그런식으로 우리부부가 싸우기를 몇번 시도했었는데 어쩜 그리도 똑같은지…
역시나….피는 못속이나 보다.
놀기 심심해서 가게 다시 차리려고 알아볼때 힘들게 왜 일하려하냐 하지마라 하더니
병원에서 쓰러진 나를 보며 속상해하는 친정 엄마한테
옷가게 팔고 얘가 2년을 놀고 먹었으니 좀더 논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식충이 취급을 하더만..
하루아침에 대동맥터져서 병들어 움직잊도 못하며 병원신세진 나한테
남편 앞길 막는다고 불쌍한 xx이 어쩌면 좋냐며 내앞에서 훌쩍이며 우느것도 꼴보기 싫었고
특히 맛없고 성의없는 뻑뻑한 자기 음식 안먹는다고 대놓고 병상에 누워있는 내앞에서 눈흘기며 인상쓰는데 기가 막혔다.
특히나 자기 친구들 불러들여 침상에 누워있는 날 구경시키며 몸도 못움직이는 내 신세에 대해 훌쩍이더니 친구들에게 자신이 동정을 받는 꼬라지를 서슴없이 내앞에서 펼치더라.
게다가 그와중에도 자기 생일때가 오니까 당연한듯이 울 엄마가 차린 생일상 받아먹는데 어이없고 괴씸하고 그랬다.
그리고 재활치료 마치고 어렵게 걸음걸음하면서 퇴원한날 집에 온 나한테 찾아와 하는 말이
자기가 젊었을때 어린 남편과 형때문에 자신이 재가를 못했다며
자기 남은 인생 책임져야 한다며 나한테 당당하게큰소리치는데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왔다..
시집이 대체 뭘 잘해줬다 큰소리인건지..
남편을 자식이라고 낳아놓고 상머슴으로 키우며 등골 빼먹던 파렴치한들이면서...
지금 상황….
2020년 뇌졸중의 휴우증으로 몸이 아직 아픈 입장이라 이것저것 여의치 않음이 속상한 마음인데
그와중에 모셔서 바베큐하며 얼마되지도 않은 남은 식구들끼리
생일에 대해 소홀히 하지 말자며 좋게 말했는데 와..
미안하단 말도 없고 뉘우침도 없더라..
내가 말나온김에 시댁에 받은거 없이도 그동안 애쓰며 잘하고 살았으니 고마운줄 알라 했더니만
역시나 시치미 뚝 떼며 괜히 어숩잖은 웃음으로 은근슬쩍 넘기려하더라..
시어머니가 누굴 닮았는지 알것 같았다.
그리고선 갑자기 변명이라 하는 말이
처음 융자받으며 집살때 받지도 않은 오만불을
내가 받은거 자기가 봤다며 우기는데 온갖 정 다 떨어지더라
나와남편이 정색하자
시어머니가 준다는것을 들었다며 말바꾸는 지독하게 뻔뻔하게 구는 저 노인네는
내가 만만하고 우스웠나보다
2021년 내생일 또한 쌩깠다...
보다못한 작은어머니가 귀뜸을 해주며 챙기라 했어도...
또 모른척하더라...
남편 속상할까봐 그동안 참고 같이 묵묵히 견디어준것 뿐인데
성품이 온순하고 그저 착해빠지기만 한 바보같은 남편은
한국말이 짧아 제대로 따지지도 못했고
어릴적 쇠뇌당해 할머니의 가스라이팅에 불려다니며 이도저도 못하며안절부절이다.
시어머니는 병들어 죽는다고 참았고
이제 시외할머니는 나이들었다고 참아야 하는건지..
저런 드러운 성깔머리를 내가 아랫사람이라고
그저 참아야만 하는게 싫다
그렇게 살다가 이렇게 갱년기에 화병까지 오니
너무 빡쳐서 잠도 못자겠고 힘들더라
옆에서 보다못한 친적 작은 어머니가 생일에 대해 말하며 짚어주었어도
여전히 보란듯이 모르는척 쌩까는 심성을 왜 내가 받아주어야 하나.....
사람 고마운줄 모르는 노인네 챙기는거 그만해야겠다고
당한대로 그대로 무시하며 갚아주고 싶다며
저나하지 않으며 관심을 끊었다
그러기를 맘먹고 이제 세네달이 되었는데...
이 망할 노인네가 코로나로 정신없이 힘들게 일하는
손주인 남편한테 회사로 전화해서
아파트 4층 할머니가 넘어져 삼일동안 쓰러져 있었다는둥
쓰러져 꿀만 먹고 버티다가 청소하는 사람한테 발견되서 요양원갔다며
세상이 무섭다고 징징징..
xx아 xx아 어떻하냐 xx아
자기한테 금방이라도 무슨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겁을 주며 남편을 닥달한다.
얼마전까지 그집 자식들은 이제 아무도 안온다며 비웃더만 말이다..
돌아가신 친구할머니가 평소 며느리 흉보고 욕하면 늘 들어주는척 맞장구치며 같이 부추겼었다.
가고나면 친구할머니가 쌍욕 많이 한다고 낄낄거리며 어머니랑 같이 흉보곤 했다.
유일한 친척인 작은집 며느리가 퀸즈랜드 갈꺼라고 할때도
내가 그때 그 며느리가 40대초반에 흔히 있는 우울증 온거 같아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작은엄마에게 말해서 좋게 다독여주라 했는데도 불구
그에대해 작은어머니한테 말한마디도 하지 않고 은근 그 상황을 고소해하며 즐거워하더라.
그렇게 남 안되는걸 좋아하는 고약한 심보가 있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아닌척 착한척 이해심 많은척은 오지게 한다.
그리고 2021년 중반에는 또 남편과 딸에게 돌아가며 저나하면서
내가 왜 저나 안받는지 영문을모르겠다라며 내 병간호땜에 힘들지 않냐하며 이간질 을 한다
퇴원해 요양하고 있는 나한테 2020년 친정엄마 돌아가시고나서 전화 몇번 해놓고선 생색이다..
한번은 화장실에 있는데 뭐가 급한지 다섯번을 한번에 저나하더라
화장실에서 나와 저나했더니 남편이 자기한테 저나하고 신음소리내며 끊었다고
남편한테 무슨일 있는거 아니냐고 헛소리 시전..
남편과 전화통화하니 전화한적 없다고..
그리고 나도 몇번은 사실 요즘 귀찮게 몰려드는 스팸전화인줄 알고 안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아이를통해 안부전화를 했는데
애한테 뭐먹었냐고 묻다가 우리끼리 갈비먹었다고 성질내더니 말하다가 말고 저나 끊어버리더라 .. @@
코로나때문에 여기 호주 전체가 봉쇄돼서 지난(21년 중반) 두어달은 아예 못갔는데
자기 들여다 봐달라며 관심끌어 오게 할려고 별짓을 다한다
젊어서 자기 남편 행방불명 됐고
같이 살던 자기 딸도 잡아먹고
집에 사는 개도 제명 못살고 죽고
그나마 챙겼던 나도 쓰러지고
나한테 뺏어가 자기 딸처럼 키웠던 손녀도
시어머니처럼 아픈걸 보면
정말 징글징글하게 재수가 없는 노인네 같다
저런식으로 불러대다가
착한 내 남편에게도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다
결론…
한국에서나 호주에서나 인생 허투루 살지않고 열심히 올바르게 살던 나였기에 처음 남편을 만났을때 한눈에 남편이 착하고 좋은 남자라는걸 알았다.
하지만 시댁이 저런 정신병자 집단이었을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처음으로 누군가와의 결혼을 결정하고선 오랜시간 혼자 호주에서 살아왔던 내가 이제는 나만의 가족을 가질수 있다는게 좋았었는데 결혼초기부터 겪으면 겪을수록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들과 비이상적인 대우에 마음 다치고 마음상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처음 준비없이 예정에 없는 아이를 갖고 낳을때까지가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다.
학생신분에 돈벌이가 없던 남편이었지만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내가 조금 희생하더라도 큰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뭘해도 다가설수 없게 만들고
나를 마치 순진한 이정한을 꼬셔낸 나이먹은 꽃뱀 취급하는 시어머니와 할머니의 속내를 깨닫기 전까지는..
애정표현하며 알콩달콩 사는 우리를 대놓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정한씨를 자기들 맘대로 부려먹지 못하게 하는 나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며 왕따시키는짓거리에 수도없이 당하며 맘다치기전까지는..
죄없는 아이에게 너가 들어섰기때문에 결혼을 해야했고 공부해야하는 아버지의 앞길이 막혔다라는 말을 하며 키웠다는것을 나중에 알기전까지..
낳자마자 뺏기다 시피 하며 내인생과 아이 인생을 참혹하게 만들어버린 두 여자의 정신상태가 온전치 않다는것을 미리 알았어야 하는 후회가..
그렇게 뺏긴 아이가 자라나 어머니처럼 정신이 약해 아프니까 마음이 무너져 내리며
원망과 원한의 화살이 남아 있는 할머니에게 향하는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처음에는 시집와서 할머니와 남편의 말을 듣고 오랜시간 폭력에 희생된 처지를 동정했다
할머니를 집안 어른으로 존경과 사랑을 담아 보살폈지만
나의 진심이 무시당하고 외면 당하며 늘 밀어내기 바쁜 할머니의 마음에는
애시당초 가족의 일원으로 내자리는 없었다.
이렇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의 원흉이 나이먹은 어른으로써
매사 자기 딸과 아이들 앞길을 막으며 아버지탓 내탓이라며
남탓만 하던 할머니란걸 깨닫게 되니..
싫어 죽겠던 어머니가 아파서 수년을 고생시키고 있을때 그 고생을 해주었어도
내가 한게 하나도 없다며 뒷담화하고
자기 암수술후 밤을 세며 옆에서 고생을 해주었건만
고마워할줄 모르는 할머니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남편의 공부를 나와 아이가 못하게 한게 아니라
애시당초 시댁은 돈들어가는 공부를 가르칠 마음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와 깨달은게 억울하다..
결혼전 모든 대학공부를 마치고 실습만 남겨둔 남편에게
아버지가 노름해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공부를 못하게 하던 시어머니는
결혼후에는 나와 애 핑계를 대며 돈을 대지 않았다.
돈 달라는 아버지에게는 남편 학비로 벌어둔돈 다 썼다며 핑계를 대어 나중에 아버지가 오히려 남편에게 돈만 가져다 쓰는 쓸모없는 아들이란 소릴 듣게 해서 그 말 듣고 어이가 없었는데...
생활비도 내가 벌어 살았고 아이낳기 한달전과 아이 난후 2개월밖에 쉬지 않았는데 그때 준돈은 남편 학비포함 주에 겨우200불 뿐..야간 비행실습비도 늘어나는데 찔끔찔끔 백불씩 이백불씩… 주면서도 잔소리가 얼마나 많던지..마치 친정에서 남편 학비 못대주는걸 내탓하듯이 행동하더라..
정말 아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엄마였다면 형이 장가 보낸다고 은행융자금 빌렸을때 더 빌려서 맘껏 공부 다 마쳐라 했어야 했지만 시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남편이 직장잡아 나가면 자신 옆에 없을것을 우려했던 마음이었을것이다.
심지어 공부하는 남편에게 형한테 사준 집 페인트 칠해주라 돈한푼 안주고 여름방학 수주일내내 땡볕에 부려먹고 아버지가 노름에 빠져 가게일 안돌본다고 시시때떄 불러다가 가게 일을 시키며 심지어 비행시험 보는 당일날 새벽에도 가게로 불러다가 부려먹더니 나한테는 남편이 시험 잘보게 하라며 못하면 너탓이라며 큰소리치던 못된 사이코같은 엄마였다.
카페도 내가 발견하고 가게 산 융자금도 내가 갚았으며 심지어 가게도 손님에게 내가 팔았는데 그 가게 판돈 삼십만불을 왜 그냥 다 주었겠냐.. 시부모꺼라서??? 천만에… 그 돈주고 인연 끊을려는 결단이어서 그랬다.
타스마니아 가서 몇년을 쳐다도 안봤는데 갑자기 암걸려 아프다고 들러붙는데.. 혹여 남편에게 한이 될까 받아주었더니 고마운줄도 모르고 신이나서 남편을 자기 죽기 직전까지 또 수년간 부려 먹으며 생고생시키던 지독한 시댁…
아주 밉고 싫고 꼴보기싫었지만 그 맘 누르며 시어머니 제사도 6년간 내가 지내주었는데 그건 시어머니가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고마운줄 모르고 그런 나한테 또 어머니마냥 싸이코짓하는 할머니를 보면서 애정이 생길리가 있나..
뭐가 당당한지 자신의 마지막을 보살피라며 윽박지르는 할머니의 억지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싶은게 내 마음이다.
난 아무도 안하는 효도를 혼자하며 그 징글징글한 노인네의 남은 노후를 챙기면서 잘해주고 싶은 마음 없다.
아니, 시어머니는 죽는다고 할말 못하고 참았지만 화병 생겼고
이제 할머니는 늙었으니 참아야 하나..
잘해주면 복받는다고..
난 그렇게 천사같은 사람이 아니다.
가족으로써의 그 모든 시간들과 살아온 과정이 이기적인 할머니의 가스라이팅이었다는걸 꺠달으니 그렇게 불우하게 집안의 머슴취급을 당하며 자란 남편이 더욱 애틋하고 불쌍하고 가엾다는 생각에 화가 난다.
나 이제 아무것도 안할란다 못하겠다
멀리하고 싶다
가까이 하면 할수록 화가 되며
도와주는 사람 고마워 할줄 모르는
그런 막되어먹은 노인네다
나이들었다고 주위에서 대접받는걸 당연하게 여기며
전혀 고마워하지 않고 배려를 권리인줄 아는 그런 노인네.
사실 지금 시대에
어느 외손주며느리가
구십먹은 시외할머니 챙기며 시집살이 하겠냐
나도 아픈데 이제 안할꺼다 할만치 하며 살았다
더이상 징글맞게 오래살려고 소식하며 운동하는 노인네의뒤치닥거리 하며
내 남은 인생 살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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